벌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다.

신학을 순천 성서신학원에서 시작하고 호남신학대학을 거쳐 장로회 신학대학원 목연과를 졸업하다.

북경에 있을 때 언어문화대학 속성과를 이수하다.

    

광양북부교회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해  은혜와 평강교회 (출소자 공동체) 담임전도사를 하며 갈보리 선교회 전도사 (교도소선교)로 동역하다, 북경 견습선교사로 파송되어 북경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탈북자 공동체 운영관리자로 사역하다.

한국에 돌아와 전주에덴장로교회 전도사로 점임사역을 다시 시작하고 정읍영락교회 부목사, 포도원교회 부목사를 거쳐 현재 강진 섬김과 나눔의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

    

이 글은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기위해 적어 놓은 글입니다. 오타나 맞춘 법등이 아직 맞지 않는 부분도 많고 수정하고 추가해야 할 부분도 많지만 본인의 살아온 삶을 소개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일수 있다고 생각되어 글을 올려놓습니다. 가끔 들어와 보면 추가된 많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장배경

    

홍정모 목사는 1970년 9월 27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338번지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나의 모습은 늘 귀공자였다. 학교는 팬티스타킹을 신고 구두를 신고 다녔다. 웃옷에는 조끼를 입고 정장 웃옷을 입고 다녔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고 누나도 동생도 그렇게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한 세트였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가장 싫었던 시간이 체육시간 이었던 것 같다. 팬티스타킹에 구두신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우리 집사람도 믿지 않으며 말도 안된다고 했는데 소풍 때 찍은 삼남매 사진을 보고 빵 터졌다. 그래서 늘 책을 읽었고 그 덕에 어려서 시험공부 하지 않아도 성적이 좋았다. 그래서 인지 마을에서는 천재라는 소리도 들었다. 어려서 미술과 웅변에 소질이 있었다. 웅변은 늘 상을 탔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한 것이라고는 학교 끝나고 밤늦게까지 들로 산으로 돌아다닌 기억밖에 없다. 산으로 들로 남의 집 포도밭으로 수박밭으로 그리고 방학이 되면 소 몰고 옛 임경업장군이 싸웠다고 하는 산위의 산성에 소 풀어 놓고 소싸움하고 지면 산 너머 깨끔 따러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 비오면 동네 앞 냇가가 넘치면 그곳에 가서 수영을 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유년기는 행복하게 잘 놀았던 것 같다.

    

나는 우리 집이 부자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른이 돼서 알게 된 것은 아주 어려운 가정인데 어머니가 우리를 부자 아이들처럼 기르신 것을 알았다. 어렸을 때는 집안이 불교를 숭배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집안이었기에 교회는 나에게 너무 멀었다. 그러던 중에도 집안 사람들 모르게 중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미션스쿨인 벌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신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모님들은 나를 일찍 보살이라고 하는 당골네 들에게 팔고 절에 이름을 새겨놓으셨다. 사주로 보면 일찍 죽을 팔자로 나왔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내가 어려서 세 번 죽었다고 한다. 한번은 겨울에 죽어서 이불을 싸서 밖에 내 놓았는데 아침에 울더란다.  내 기억으로도 어려서 약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가끔 거울에서 거지 가족이 나와 내 이불을 가져가려고 해서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몸에 열이 많아 그런다고 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유년기 신앙생활

    

본인이 어렸을 때 다니던 칠동 교회는 치유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병자들이 늘 교회에서 고침을 받고 전도사님 기도로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치유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당시 불신앙이 뿌리깊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서로 짜고 치는 고스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아이들에게 다 거짓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렇게 다니는 나를 유심히 보고 계시는 분이 있었는데 전도사님이셨다. 어느 날 전도사님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교회에 가보니 귀신들린 부인이 와 있었다.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했다. 나는 "미친 사람은 병원에 데려갈 것이지 무슨 쇼를 하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같이 귀신을 쫓는 제안을 했고 '나는 어떻게 하는지 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 나는 전도사님의 제안을 받아 들였고 이 일이 나를 예수님을 믿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전도사님은 귀신이 나와서 가장 믿음 없는 사람에게 들어갈 줄 모르니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믿음 없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이 계시면 귀신이 내안에 들어오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귀신의 존재도 믿지 않았던 나에게 무언가 두려움이 오자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전도사님이 귀신이 나갔다고 했다. 눈을 떴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방금까지 정신이 나간 아줌마가 정신이 돌아와 울면서 '감사하다'고 하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정말 귀신이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이 바뀌었다.

    

    

'하찮은 귀신이 있다면 하나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천국과 지옥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만나야 겠다'는 생각으로 3km정도 되는 거리를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하러 나갔다. 전도사님은 그때 나에게 '주의 종이 되라'고 하셨다. 나는 다른 꿈이 있어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지만 전도사님은 주일학교 설교도 시키시고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중고등부 부장과 주일학교 부장도 시키셨다.

    

나에게 있어서 전도사님은 영적 아버지시다. 늘 관심을 가져 주시고 전도사님이 없었다면 더 힘든 목회를 했을 것이다. 한번은 사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에서 힘들다고 했는데 다행이 다시 소생하셨다. 주일 저녁예배 드리기 전에 전도사님이 '밥 먹으로 오라'고 해서 사택에 갔더니 사모님이 나를 보더니 화를 내셨다. '둘이 같이 살아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사모님이 사경을 해매고 있을 때 전도사님이 옆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자기 걱정하지 말고 어서 천국가라고, 자기는 정모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전하다가 정모가 신학 끝내고 목사 되면 그 교회 가서 같이 목회하다가 천국 가겠다'고 말이다. 이 말이 억울해서 '꼭 다시 살아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살아나셨다고 밥을 차리면서 전도사님과 나를 보며 '둘이 같이 살아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밥 먹으러 갔다가 혼이 났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추리하려고 산에 나무를 베러 갔는데 거기에 하트표시가 된 돌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다 전도사님께 드렸는데 아침저녁으로 전도사님이 보고 또 보고 하셨나 보다. 그것을 마음에 좋지 않게 생각한 사모님이 내다 버렸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그 후 로는 사택에 가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다.

    

내 기억의 전도사님은 나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었다. 나는 전도사님의 모습에서 주님을 보았다. 늘 인자하시고 교회를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그 분을 보며 나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늘 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내가 평신도로 처음으로 모신 목회자이고 마지막까지 섬긴 목회자이다.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주님의 목자이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도사님을 보고 절대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늘 힘들게 사시는 모습이 나에게는 목회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일로 보였다. 작은 시골교회에서도 작은 일로 늘 다툼이 있고 그것 때문에 늘 우시는 모습이 나를 목회에 대한 마음에서 더 멀어지게 한 것이다.

    

내가 회심한 그해 여름성경학교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그해 내가 사는 칠동 마을 아이들을 다 전도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전거를 가지고 다른 마을 아이들을 실어 와서 주일학교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에 일곱 개 마을에서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가 없을 정도로 부흥을 했다.

얼마 전 어머니와 후배 허경식이 이야기를 했다. 경식 이는 교회에서 가장 가까이 사는 아이였는데 전도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어렸을 때에는 교회에도 열심히 다닌 아이였는데 교회에서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어렸을 때 경식 이는 팔이 머리위로 올라가지 않았는데 치유 받고 정상적이 되었다고 전도사님에게서 들어서 쉽게 전도될 것이라 생각했건만 반응은 늘 싸늘했다.

그러던 경식이가 교회  나온다고 나에게 약속을 했다. 그래서 그 아이집 앞에 기다리는데 금방 나온다고 하고는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실 가려고 하던 경식 이는 나를 보고 울어버렸다.  시골은 선후배의 차이가 엄격한데 선배가 한 시간이나 기다렸으니 겁이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 날 교회에 경식이가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한주도 빼놓지 않고 교회를 잘 나왔다.  내가 신학교를 간 이후  경식이가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교회 안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처갓집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렸을 때 전도의 열정 하나만큼은 경식이나 나나 일등이었다.

    

  그해 나는 하나님이 살 아계시다는 뚜렷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은 후 가족구원에 대해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상에 젖어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을 구원하여 주셨다.

    

우리 집 가족 중 가장 먼저 교회 나온 사람은 동생이다. 어려서 눈 하나를 다쳐서 늘 병원에 있었던 동생을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셨던 같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친구들이 교회 나오지 않으면 성전에서 친구들을 위해 울며 기도하던 어린 동생이 기억난다. 부모님의 전도는 그리 쉽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극심하게 반대하시던 분들이라 전도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불치병을 않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수술하러 가셨는데 이미 암이 퍼져서 수술 도중 포기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의지할 것이 하나님밖에 없어 추운 겨울 성전 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말이다.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 의사의 한마디가 두 분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치료하러 갔는데 집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지 병이 차도가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 의사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 말 한마디에 희망을 걸고 두 분이 교회에 나오신 것이다.

    

    

주일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와 교회 나가시겠다'고 했다. 나는 농담으로 여겼다. 그래도 혹시 해서 기다렸는데 오전예배가 다 지나가도록 오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집에 가서 딸기하우스를 하시는 아버지를 도우러 갔는데 '그날 딸기를 따는 날이라 못 오셨다고 다음 주부터 나오시겠다'고 했다. 수요일 날 교회 오라는 초종이 울리자 아버지는 '그날부터 나가시겠다'고 했다. 재종이 울려도 꼼짝 하시지 않은 분이 가자하며 일어섰다. 이미 시작하는 종이다 하자 '진작 말하지 그래도 가자'하시면서 앞장서서 교회를 나가신 것이다. 그날 교회 들어서자 놀란 전도사님이 설교를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계신 모습이 오늘도 눈에 선하다.

    

교회 나가신지 얼마 안 되어 교회 부흥회가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전도사님이 아픈 어머니에게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셨나 보다. 어머니는 그때 마음이 많이 좋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도 하라고 하니 한다 하시면서 저녁을 준비하고 집회에 참여했는데 부흥강사 목사님이 머리를 뚝 치고 안수 하고 지나가시더란다. 좀 지나자 배가 아파오고 화장실에 갔는데 배에 찬 복수가 피가 되어 빠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집에 가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더러 집에 가자하고 집에 왔는데 몸이 가푼해진 것이다. 나중에 병원에 가니 완치되었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기적이 일어나자 두 분은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1999년도에 별세 하셨고 어머니는 벌교 칠동 교회 회계권사로 열심히 봉사하다 은퇴하셨다.

    

목회자의 길을 걷다

    

나는 전도사님이 신학을 하라는 말에 마지못해 하는 척 하며 빈둥거렸다. 그때 나에게 깊은 체험이 왔다. 대낮에 낮잠을 자는데 벽이 깜깜해지더니 검은손이 나와서 내 심장을 쥐고 꺼내갈려고 하는 것이다. 갑자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죽어가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예수 믿는 나를 주님 구원해 달라'고 죽는 중에 기도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꼼짝할 수 없던 몸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군 제대 후 전도사님 추천으로 순천성서신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순천 성서신학 원을 다니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훌륭한 목회자님들을 통해 각 장마다 주해하는 법과 조직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 원을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성서신학원 다니면서 나는 아주 별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귀신을 쫓은 능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곳저곳 귀신 쫓은 곳에 불려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귀신들린 사람들도 인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믿음으로 쫓아내야지 억지로 해서는 사람에게 상처만 입힌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귀신 쫓는 사역을 아주 멀리하고 사는 이유도 어려서 상처 입은 많은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신학원을 다니면서 2학년 때 광양북부교회 교육전도사로 시무하며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땐 철이 없는 전도사가 정말 철없이 설쳐대고 다닌 것 같다. 교회에서 방을 하나 내어주었는데 토요일 오전에 가서 열심히 심방하고 전도하고 구령에 열정에 잡혀 살았다. 그래서 교인들이 전도사님 잘 들어왔다고 칭찬받고 교회학교와 중고등부가 70명 정도 부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담임목사님에게는 아주 해가 된 것 같다. 그해 말 전도사 사례비 문제로 선임 장로님과 담임목사님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사모님에게 듣고 교회를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는 전도사가 너무 설쳐 교회에 분란을 일으킨 것 같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호신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교회에 사임서를 냈다.

    

출소자들과 함께 살다

    

성서신학원을 졸업한 후 호남신학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교회를 사임한 나는 갈 교회가 없어 평상시 늘 존경했던 이광민 전도사님이 목회하고 있는 백운동에 있는 은혜와 평강교회를 가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난후 전도사님이 설교를 요청해 오후 설교를 했다. 광고 시간에 갑자기 전도사님이 나를 새로운 목회자로 소개했고 어떨떨한 상황에 교회를 맡게 되었다.

    

이광민 전도사님은 안구에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하시다며 교회를 나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고 계획 없이 은혜와 평강교회 담임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주일 오후 설교 한번하고 부임하다보니 교회에 대한 정보도 없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부임하였다. 부임한 이후에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은혜와 평강교회는 일반교회가 아닌 청송감호소나 일반교도소에서 출소하여 갈 곳이 없는 무의탁 출소자들의 공동체교회였다.

    

그런데 이 교회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언제가 "홍전도사는 답이 없어"라고 말한 분이 있었다. 성서신학원을 다닌지 얼마 안되 장기를 가르쳐주신 어르신이 있었다. 같이 신학을 했지만 그분은 신앙이 얼마 없으신 분이었다. 그분이 보시기에 나는 한참 모자란 인간으로 보였는가 하루는 그분이 걱정하시면서 "너는 목회가 안될 것 같으니까 차라리 자동차 고치는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잘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내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내 모습은 그 어르신 말씀과 같았다. 키는 땅딸만하지, 얼굴은 매주지, 책을 읽은 순간 안개처럼 머리에서 사라져 장학금 면제 받고 다니는 천재지, 그렇다고 집이 너무 부자라 20만원 정도하는 학비도 제대로 못내 늘 서무실에 독촉 받는 사람이지, 집안에 혼자 예수 믿는 독불장군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옆으로 봐도, 누구하나 도와주고 걱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마음에 좌절이 왔다. 무엇을 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 할 줄 아는 것이 기도요,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요, 해야 하는 것이 기도밖에 없어 내 인생의 미래를 놓고 기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 제목은 구체적 이었다. 제게 개척교회 하나 주세요. 제게 한국의 어느 강단이든 서게 해주시고, 전국을 선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신학 마칠때까지 학비 걱정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음성 한마디 들려주시지 않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열심히 기도하던 어린청년과, 죽어라 모기 물린 다리만 생각난다.

  그 해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그 다음해 사역지를 그만두고 아는 전도사님 교회에 갔는데 오후 설교를 부탁받고 그 교회 전도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따라 살면서 교도소 선교를 하게 되었고, 전국에 있는 큰 강단에서 간증 설교도 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학비도 하나님은 그때그때 해결해 주셨다. 뒤돌아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무 오래되어 이제 그분들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같은 고향 벌교 출신 김동일 아저씨는 전도사가 자기 고향출신이라며 늘 술 먹고 들어와 형제들을 괴롭히며 큰소리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루는 술 먹고 들어와 예배당에서 갑자기 성령 받고 기름에 새우 튀기듯이 뛰던 일도 있었다.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시고 사셨지만 아마 지금은 돌아가셔서 천국에 계실 것이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정부 고위 관리를 하다 아내를 죽이고 방화한 죄로 오랫동안 광주교도소에 있다 출소한 박집사님도 보고 싶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찾아가보지 못했다. 교도소에서 배운 서예로 국전에도 입상한 유능한 분인데 한 번도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예배당을 쓸고 닦은 그 모습이 오늘도 눈에 선하다.

감호소에서 불치병으로 나와 하나님의 은혜로 완치되고 형제들에게 천사같이 살다 어느 날 형제들 돈을 다 뺏고 교회 재정도 달 말아먹어 버리며 나를 죽이겠다고 소리 지르며 다시 악마가 되어버린 이** 집사도 보고 싶다. 그때 너무 어려 이** 집사에게 사랑을 주지 못해 생긴 일 같아 미안하고 미안하다.

천사 같은 우리 송 장로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평신도에서 집사로 내가 떠난 이후 장로님이 되셨다고 하는데 그분은 내가 일생 만난 천사 중 한분이시다.

    

그리고 어린 나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장전도사, 이분을 만나게 한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 분을 만난 것은 교회를 맡고 몇 달 후였다. 나중에 생활관을 이분이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갈보리 선교회는 지금 사라져 버리고 다른 단체가 되었지만 이 단체를 만든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삼천교육대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살아온 13사람들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 떠나고 내가 갔을 때 장전도사만 남아있었다.

내가 본 그는 깡패였다. 당시 교도소 선교를 같이 다녔는데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갔다. 그러나 점점 그를 알아가면서 그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헌혈차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일주일에 한번 꼭 헌혈하는 사람, 아무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콩팥을 이식해 준 사람, 한 눈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고 반대하는 부인과 날마다 싸우는 사람, 술 먹고 온 생활관 형제에게 두들겨 맞아 코가 삐뚤어져 버렸는데 그 사람을 용서한 사람, 자기를 찾는 제소 자가 있다면 언제 어디든 달려가는 교도소 선교에 미친 사람, 내가 만난 장전도사의 모습이다.

    

같이 다니면서 이사람 예수 믿는 것 맞아 하는 생각을 수천 번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주님 사랑하는 방법으로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사는 사람 내가 만난 장전도사이다. 내가 중국에 가기 얼마 전 그 어떤 사람은 절대 받아주지 말라고 했건만 그 사람이 길거리에서 옷 장사하는 것이 불쌍하다고 또 받아주어 결국 그 사람에게 선교회 다 빼앗기고 교도소에서 몇 년을 산 바보 같은 사람이다.

배신한 그 사람 이야기는 아직 살아있어서 여기에 적지 못한다. 교도소에 있던 사람을 신학하게 해주고 결혼 중매를 서주고 했는데 그 은인이 교소도 가자 배신하고 선교회를 빼앗으려고 해서 내가 선교회에서 퇴출해 버렸다. 그런데 바보 장전도사는 교도소에 나오자마자 그 사람 걱정만 했다.

나는 그런 장전도사에게 평생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한발자국도 선교회에 들여 놓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때는 알았다고 해놓고는 내가 중국 선교사로 가 있는 동안에 목회를 안하고 길거리에서 옷을 파는 것이 불쌍하다고 그 친구를 다시 데려다가 놓았다고 . 그런데 결국 모든 것을 그 친구에게 빼앗겨 버렸다. 장전도사는 나만 보면 내 말 안들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곤 한다.

    

장전도사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자신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부산으로 원주로 내 집처럼 뛰어다니며, 젊은 목사들에게 굽실거려 지원받은 돈을 다 자신들의 영치금으로 넣고 출소하면 돌보아 주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그 사람들을 통해 너무 일찍 배워 버린 것 같다.

    

  내가 은혜와 평강교회 부임한 첫 주에 생활관을 방문하였는데 먹을 것이 없어 변변치 않은 가운데 23살 먹은 어린 전도사를 인정해주고 새로운 전도사님이 오셨다며 특별 식이라고 수재비와 김치를 내놓은 것을 보고 그 특별한 마음에 감격하여 그들과 신앙생활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몇 주간은 주일만 봉사했는데 형제들이 같이 살기를 원해서 선교회로 이사를 하고 70여 형제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경찰서에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어린나이에 무섭기도 했고 세상 사람들도 가까이 하지 않는 두려운 사람들과 산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한 여름에 잠자기 전에는 방문과 창문을 꼭 걸어두고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일어나 확인할 정도로 무서워하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고 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들이 아닐까하는 마음에 더욱 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던 중 주님께서 큰 권위를 주셔서 형제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나를 두려워하며 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은혜를 주셔서 별 어려움 없이 목회할 수 있었다.

    

은혜와 평강교회에서 목회하며 갈보리 선교회 전도사로도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전국에 있는 교도소를 돌아다니며 선교할 수 있는 은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주로 목포 광주 장흥 군산교도와 청송감호소를 다니며 선교하였는데 그때 만난 형제들이 지금은 출소하여 전도사님도 되고 목사님도 되셔서 개척도 하시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하나님께 충성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곤 한다.

    

은혜와 평강교회 부임하고 처음 한일은 예배당을 생활관에 옆에 짓는 것이었다. 당시 생활관이라고 해봐야 비닐하우스를 짓고 위에 검은 장막을 치고 안에는 블럭으로 칸을 막아 서로 생활하는 비닐하우스 집이었다. 그리고 콘데이너 가 13동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람이 살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당시 백운동 예배당도 지하에 있어서 늘 물이 차고 여름에 습기를 쓰레받기로 걷어내야 할 정도 였다. 그런데도 그때 500에 매달 20만을 준 것 같다. 예배당 짓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생활관 옆에 웅덩이를 매우고 그 위에 짓기로 했다. 그런데 웅덩이를 무엇으로 메우느냐가 문제였다. 당시 어떤 전도사가 제안한 안건이 좋아 우리는 광주 지역 건설현장에서 폐 시멘트를 가져다가 거기에 매우고 다지기로 했다. 흙을 넣으면  진흙탕이 될 것 같아 시멘트 폐기물로 웅덩이를 매우는 방법을 쓴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안하겠지만 돈이 없는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

    

그 다음날부터 나와 홍전도사는 2.5 타이탄을 가지고 폐 시멘트를 모으러 다녔다. 공사장에는 대 환영이었다. 자신들도 골칫거리인 폐 시멘트를 치워 준다니 다들 좋아했다. 둘이 그 웅덩이를 다 매웠다. 그리고 조립식 예배당은 장전도사 지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앙카박고 줄치고 자제 사다 뚝딱뚝딱 하더니 멋진 건물이 하나 나왔다. 장전도사는 거기 평생 살 것이라며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천장의 트러스들을 나사로 묶지 않고 용접해 버렸다. 용접은 김용기 형제가 했다. 멋진 예배당이 지어졌다. 예배당 옆으로는 뺑 둘러서  20개정도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형제들을 다 그곳으로 이사시켰다.

    

예배당을 짓고 얼마 안 되어 문제가 생겼다.  무료로 쓰라던 땅주인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사업이 힘들었는지 우리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당시 땅이 아주 넓었기 때문에 다들 살려고 했으나 출소자들이 살고 있다는 말에 아무도 그 땅을 사지 않았는데 그런 땅만 전문으로 사서 돈버는 사람이 그 땅을 샀다. 어느 날 그 땅 주인이 와서 장전도사와 나를 만나고 갔다. 그리고 땅을 비워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사 비용도 필요하고 이사 할 수 있는 땅을 구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자 막말을 하며 막무가내로 땅을 비워야 된다고 했다.

화가 난 장전도사가 펄펄 뛰었다. 내가 학교를 간 후  그 땅 주인은 몇 번 더 생활관에 왔던 모양이다. 그 땅 주인은 장전도사의 화를 자꾸 돋우고  그것을 몰래 녹음해 갔다.  결국 장전도사는 협박죄로 교도소로 잡혀가 버렸다. 어떻게 힘을 썼는지 검사가 직접 개입을 했다. 그 검사가 하루는 생활관에 왔다. 무서웠는지 힘좀 쓰는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와서는  땅을 비워주면 장전도사를 내 보내주겠다고 했다. 교도소에서 장전도사는 처음에는 버티더니 백기를 들었다. 우리도 방법이 없어 생활관을 비우기로 했다.

    

이사 비용을 달라고 하자 땅 주인은 예배당을 철거하라고 했다. 별수 없이 1년 사용한 예배당을 철거해야 했다. 예배당 지을 때는 모두들 즐거워 도와주더니 철거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지붕을 철거하고 벽과 트러스만 남았는데 문제는 트러스였다. 나사를 조여야 할 부분을 다시는 이사 가지 않는다고 장전도사가 용접해 버린 것이다. 방법은 사다리타고 올라가서 그라인더로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산소로 불면 어떠냐고 하자 높아서 위험하고 불어버리면 다시 쓸 수 없다고 해서 다른 곳에 가서 그것을 다시 써야 하기 때문에 그라인더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다. 결국 그 다음날부터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내가 그 일을 했다. 예배당 짓고 감격해서 운 눈물보다 예배당 철거하면서 운 눈물이 10배는 더 많을 것이다.

첫날 10개 트러스중 네 개를 철거했다. 손이 얼얼했다. 그 다음날 여섯 번째 트러스를 철거하던 중 사고가 났다. 공중에서 그라인더를 놓쳐버린 것이다. 나는 그라인더를 놓치면 땅으로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라인더가 내 앞에서 날고 있었다. 헬리콥터처럼 내 앞에서 날다 내 머리를 치고 등 뒤로 넘어가 옷을 감고 멈췄다. 죽었다 싶었다. 머리가 어떤 상태인지 머리를 만졌는데 평평한 부분이 치고 넘어가 다친 데는 없었다. 내려와 옷을 보니 옷을 걸레처럼 찟어져 있었다. 혼자 벽에 기대고 앉아 울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형제들이 미웠고 그런 상황 자체가 싫었다. 다시 올라가 일하다 또 한 번 그라인더를 놓쳤다. 또 머리를 치고 등 뒤로 넘어가 옷을 감고 멈쳤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만 각도가 빗나갔으면 얼굴이나 머리를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날 그냥 거기서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용기형제가 보았는지 그제야 와서 도와주었다. 그날 트러스를 완전히 철거하고 그 다음날 벽체를 완전히 철거했다.  나는 예배당 철거 하면서 또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내가 은혜와 평강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는 이** 집사로부터 시작된다. 장전도사가 땅 문제로 땅 주인을 협박했는지 어느 날 검사가 와서 데려가더니 광주교도소에 있다고 연락이 왔다. 교회뿐 아니라 생활관도 이끌어 가야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재정장부를 보는데 문제점이 있었다. 그날 또 동일이 아저씨가 이집사가 자기들 돈을 착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착한 이 집사님이 내말을 들어줄 것이라 믿고 그날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반응은 무서웠다. 죽일 듯이 대들며 tv를 밖으로 던졌다. 작은 냉장고도 들어 던졌다. 유리창에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칼을 들고 흔들며 자해를 해서 자기 손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고, 입에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욕들이 나왔다. 악마였다.

    

나는 흥분된 그 사람을 진정시키려고 30분 후에 이야기 하자고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중 배신감을 느꼈다. 형제들 방에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 불 끄고 자는 척 하는 것이다. 어제 까지 같이 죽고 같이 살 자던 형제들 아닌가?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들이 책임지겠다고 하며 나를 부추겼던 사람들이 아닌가? 하며 배심감이 들었었다. 돌아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방에 돌아오자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거기가 어딘줄 모르지만 그곳을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다급한 어머니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답답하여 전화하셨다는 것이다. 걱정하실 까봐 좋은 교회에서 목회 하고 있다고 이야기 했는데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를 끊고 선교회를 나오는데 이집사가 쫓아왔다. 숨이 막혔다. 다행히 빈 택시가 와서 그 택시를 잡아타고 빠져 나왔다. 갈 곳이 없어 항공이라는 친구에게 연락해 며칠 그 집에 피해있었다. 거기에서 들려오는 교회 소식은 나를 경악하게 했다. 내가 이 집사를 모함했다고 모 전도사가 설교하고 광고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장전도사를 배신하고 선교회를 강탈한 사람이다. 남은 출소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그때 그 사역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곳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곳은 내가 연단 받을 장소이지 평생 있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교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며칠 후 김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부장은 화순 생활관을 관리하는 분인데 과거 유명한 조폭이라고 하는데 절대 본명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형제들은 다들 김 부장을 무서워했다. 아침마다 정권을 단련한다고 소나무를 주먹으로 치는데 장작 패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칼을 던져 파리를 잡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 부장은 나를 아들처럼 아꼈다. 어느 날 광주 생활관에 왔는데 내가 도망간 상황을 알고 이 집사더러 그 날 중 떠나지 않으면 교도소에 가든지 자기 손에 죽던지 할 것이라고 하자 그날 이집사가 선교관을 떠났닥 한다. 그래서 나더러 다시 들어오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다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다 정리할 것도 있고 장전도사가 교도소에서 나올 때 까지만 있기로 했다.

    

탈북자 친구들을 만나다

    

호남신학을 졸업하고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목회과정을 공부하던중 선교학을 가르치시는 이광순 교수님의 추천으로 중국 북경 ===교회 견습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었다. 이광순 교수님은 영락교회 장로로 인공심장을 달고 다니셨다. 집에 초청받아 간적이 있는데 가슴에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셨다. 나에게 왜 선교사로 가려고 하냐고 물으셔서 상황을 설명 드렸더니 내가 신청한 방글라데시에 가면 죽어 돌아 올수 있으니 중국으로 가라고 하셨다. 솔직히 그땐 도망갈 구멍이 필요했다.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광주의 일을 그만 두는 것은 중국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 장전도사가 가장 강경하게 반대했다.

나중에는 다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중국행을 결정했다. 마음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형제들도 알았는지 내가 중국으로 간지 한 달도 안 돼 목사님을 담임으로 모셨다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서 은혜와 평강교회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중국 북경에 가자 나를 배웅온 사람들은 +++교회 청년들이었다. 북경 +++교회는 유학생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교회였다. 북경 +++교회에서는 청년부와 중고등부를 담당하였다. 나와 함께 들어간 사람은 인전도사 그리고 그곳에서 사역한 사람들이 송++, 최++, 한사람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배들이었다. 반년정도 남은 사역을 우리에게 이관하기 위해 준비들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아 나는 홍차장 +++은 인차장이 불렀다. 선배들은 다 성을 따라 송부장 최부장이라고 불렀다.

    

처음 중국 생활을 너무 재미있었다. 언어를 배워야하기 때문에 언어문화 대학에 속성과에 입학했다. 다들 학생으로 알고 있는데 내 주임교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보다 어렸지만 늘 나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 하러 중국어를 배우는지 어디에 사는지 영어로 꼬치꼬치 물었다.

    

중국 생활은 순탄하게 시작했지만 곧 어려움에 빠져 들었다. 당시 선교사님들이 탈북자들을 1-2명씩 개별적으로 숨겨서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탈북자들을 한곳에 모아 성경교육과 인성교육을 시키기로 결론내리고 탈북자들 한곳에 모아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누가 이 들을 데리고 사느냐 였다. 나는 당시 여행 중이었는데 관리자로 나를 선택해 놓은 것이다. 선교사님들은 내가 한국에서 출소자 특수 사역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를 관리자로 세운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출소자 선교를 했다고 할때는 믿지도 않던 사람들이 힘든일이 생기자 자기들끼리 결정해 버린 것이다.

어쩔수없이 그 일을 맡았지만 그 일을 맡고마자 나에게는 재정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심한 압박이 다가왔다. 탈북자들을 내게 맡겨놓고 다들 나를 멀리했다. 혹 잡힐까 본인들에게 어려움이 달칠까 두려웠을 것이다. 웃겼다.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선교사로 온 사람들이 한 행동에 참 어이 없었다. 그때의 심정은 여기에 적지 못하겠다. .

    

한국은 당시 IMF가 닥쳐와서 선교비가 바닥이 나 선교사님들이 한분 두 분 철수하고 선교비가 끊어져 당장 탈북자들이 굶주릴 상황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흰 쌀밥과 된장국만 놓고 밥을 먹으려 하는데 "한국만 어렵지 다른 나라는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은 기도할 문제다"라는 생각에 탈북자들과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당시에 조선족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제자가 3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여 여행사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그 제자가 일본인 관광객을 데리고 두만강 접경지역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두만강에 북한 사람 시체가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본 일본인이 "왜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거두어주지 않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제자가 "북한은 지금 기아 때문에 자기 목숨도 제대로 부지를 못한다. 그들을 돕는 한국 사람들도 좋은 않은 경제 사정 때문에 다 돌아가고 있다. 북경에 내가 아는 선교사님이 계시는데 그분도 지금 탈북자를 여러 명 데리고 있다. 난 지금 그 분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일본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 그 한국인 내가 도와주면 안 되냐고 묻더란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일본인을 통해서  몇 달간 평안하게 선교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

    

탈북자들과 생활하던 중 중국공안이 집집마다 수십 명이 둘러싸고 거류 증을 불시에 검열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저녁에 개가 한번만 짖어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나중에는 그 압박감이 심해 불면증으로 발전하게 되어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탈북자에게 특별한 꿈을 꾸게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안전을 지키시겠다는 약속과 같은 것이었다.

그날도 잠을 자지 못해 새벽이 되었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새었는데 코를 골고 자는 형제들을 보니 화가 났다. 그래서 발로 성민 이를 깨웠다. 그때 성민이가 하는 말이 "홍부장님 물고기도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슨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냐 빨리 새벽예배 드릴 준비하라"고 하자 다들 일어나 예배드리러 모였다.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성민이가 보여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자 "우리 형제들이 13능에 산 기도를 하러 갔는데 시간이 남아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회를 해먹기 위해 칼로 배를 갈랐는데 뼈에 금 글씨가 쓰였는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쓰였다는 것이다. 나는 내 머리에 '익투스'라는 말이 떠올랐다. 카타콤에 숨어있는 성도들이 안전의 표시로 쓰던 글자가 헬라어로 익투스 물고기라는 글자다. 철자를 하나씩 떼어놓아 다른 낱말을 만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이시다"는 글자가 된다. 그것은 나와 형제들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평안히 잘수 있었다.

    

어느 날 탈북자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중국공안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한 탈북자가 이 사실을 다른 탈북자들에게 알려서 모든 사람이 공황상태에 빠졌다. 침대 밑에 숨는 사람, 공안을 죽이고 탈출하자는 사람, 화장실을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등 모두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데 한 탈북자와 조선족 제자가 잡혀가도 신앙을 부인하거나 변절하지 않게 해달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죽고자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이 어려움 속에서 건지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죽음의 덧에서 피할 길을 열어주셨고 죽음의 위기를 피해서 계속 이동 중에도 나는 그 약속을 신뢰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우리를 안전한 장소가운데로 인도해 주셨다. 거주하는 집이 중국공안에 둘러 쌓였을 때도, 형제들이 한두 명 잡혔을 때도, 그때마다 피할 길을 주시고, 그들을 다른 선교사님께 인도할 때까지 한사람도 상하지 않게 하신 것을 체험하며 모든 어려움가운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성민이는 지금 한국에 들어와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탈북자 방송인 자유방송 대표 김성민 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가끔 tv조선에 나오는 것을 가끔 본다.

    

성민이는 부시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까지 같다오고 유엔에서도 상을 받았다고 한다. 옛날 탈북자 성민이가 아니다. 성민이에게 성훈이도 한국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지금 춘천에서 풀빵 장사한다고 한다. 성훈이는 잘 먹고 잘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알까? 자신들을 잊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 내 아들들 이름을 성민이와 성훈이로 지은 것을 말이다. 그래도 나는 후회 안한다. 기도가 응답되어 그들이 살아서 한국에 들어와 있지 않는가!

    

졸업후 에덴장로교회에서

    

한국에 들어와 다시 복학했다. 중국에 있었던 일을 적어내면 학점을 3학점 준다고 해도 혹 중국 안에 있는 형제들이 다칠까봐 몇 년간 입 다물고 살았다. 그런데 잠깐 2주 우리에게 와서 석가좡으로 간 ***이 자기 일처럼 내 사역을 적어 학점을 받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참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었다. 생명이 걸린 문제들인데 그렇게 함부로 글로 남기면 안 되는 일들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화가 났다. 나는 중국 일을 침묵 할수 밖에 없었다.  그땐 중국에 남아있는 형제들을 위해 조용히 살아야 했다. 그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니까!

    

중국에서 돌아와 신학대학원 졸업을 압두고 전주 에덴장로교회에서 전임전도사로 전임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성서신학원에서 만나 호남신학대학교를 다니며 오랫동안 교제해왔던 이명옥 전도사와 결혼을 하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낸 시기였던 것 같다. 사례비 60만원 가지고 둘이 살았다. 결혼했다고 부모님 용돈 5만원 드리고 그 돈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보면 신기하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둘이 예수님을 위해 마음을 다해 살았던 것 같다. 교회는 나름대로 모두들 열심히 있었는데 내가 하는 사역에는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사역했다. 매주 집에 있는 조립식 컴퓨터를 가지고 주일학교 설교를 하러 갔다. 당시 조립식 컴퓨터는 아주 무거워 가지고 다니기가 버거웠지만 그래도 매일 그 컴퓨터를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전주에서 처음으로 파워포인트설교를 했다. 주일학교 동영상 설교는 아이들에게 대 히트였다.

    

에덴교회에서 가장 기억되는 것은 석호와의 만남이다. 석호는 나를 아주 잘 따르는 친구인데 한번은 차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운전 주행연습을 시켜주었다. 그곳은 개발지역이라 차가 다니지 않았고 주일 오후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었다. 두 바퀴를 돌고 세 번째 도는데 갑자기 다를 봉고가 와서 교회 차 이스타나 앞을 들어 받더니 한 바퀴 굴렀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더 놀랐던 것은 뒤집어진 봉고차 안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나오는 것이다. 정말 기절할 일이었다. 그 차도 교회차인데 운전한 청년이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교회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소방서와 병원차들이 몰려와 아이들을 실어 날랐다. 다행히 아이들은 놀라기만 하고 교사 한명만 손목골절상을 입었다. 기적 중 기적이었다. 우리 차는 앞면을 전체 갈았고 상대방차는 폐차시켰다. 다행히 보험하신 장로님이 잘 처리해 주셔서 완만히 해결되었다. 이후 석호는 나만 보면 늘 죄인처럼 미안해했다.

    

  에덴교회에서는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그렇게 순수한 사람들을 만나본적이 없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지만 아주 복잡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순수함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교회 봉사가 친목회가 되고, 어떤 이들은 직분을 얻는 과정이 되기도 하고, 명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그들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에덴 교인들은 달랐다. 한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애타고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기도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얼굴에서 보였다. 그에 반해 교회 지도자들은 그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일생 그런 순수한 교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그 교인들의 이름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에서 잊혀 가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내 평생 간직하고 살 것이다.

    

평안했던 정읍영락교회에서

    

목사고시를 합격하고 목사안수 받을 수 있는 교회로 옮겨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정읍영락교회로 옮겨서 200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정읍영락교회는 당시 은퇴를 앞두고 계신 조용섭 목사님께서 시무하고 계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따뜻하고 아버지 같은 조 목사님을 통해서 오랫동안 특수한 사역으로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에 회복과 쉼을 허락해 주셨다.

    

처음에 부임했을 때 조 목사님은 아주 어려운 분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늘 대해주셨다. 그곳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가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첫째 아들 성민이가 엄마 배속에 있을 때 너무 빨리 세상에 나오려고 해서 정읍 아산 병원에 갔을 때 주사를 받았는데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 때 의사는 산모와 아이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광주 전대병원으로 옮기기로 하고 산모는 어머니와 앰뷸런스를 타고 가고 나는 봉고차를 타고 가는데 뒤 따라가다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 마음을 살아만 있어다오 하는 마음이었다.

전대 병원에 가니 응급실에도 없고 산부인과로 가라해서 가니 의사가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한 달 정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루 있다가 정읍으로 올라왔는데 갑자기 배가 아팠다. 그날 데굴데굴 굴렀다. 이종만 전도사님이 한약방을 하고 있어서 진찰을 받았는데 배탈이라 해서 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아산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요도 결석이라는 것이다.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와 산모가 저렇게 있는데 수술할 수 없었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안 하면 하면서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참아보자 하고 주사를 맞고 약을 타서 교회에 왔는데 통증을 참을 수 없었다. 주일날 낮 예배는 뒤에 일어서서 예배를 드렸다. 아파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누워 있다가 오후 찬양예배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 찬양이라고 하러 가자하고 본당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통증이 왔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꾹 참고 찬양을 따라 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부터 시원한 물줄기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었지만 통증이 갑자기 없어졌다. 그리고 오후 예배를 드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다.

통증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기에 깊은 잠에든 모양이다. 배가 고파 잠이 깼다. 새벽 2시쯤 일어나 밥을 먹고 생각해 보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음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돌이 깨져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기적이다. 의사는 가끔 그런 일이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후 성민이는 이 땅에 무사히 태어났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집사람이 또 아이를 가졌다. 첫째를 힘들게 낳았기 때문에 둘째는 극도로 조심했다. 그런데 출산을 얼마 앞두고 집사람이 하혈을 했다. 병원에 갔는데 아이의 태반이 끊어진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유도 분만을 해야 하는데 아이는 힘들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주사를 맞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 문자를 넣었다.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염치고 뭐고 없었다. 저녁 시간 의사와 간호사만 있다가 식사한다고 나갈려다 내가 원망스러워 하는 눈으로 보자 다시 한 번 산모를 보고 가자하더니 의사가 아기가 나온다 하면서 간호사에게 아이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고 간호사가 나에게 싸인을 받아가고 아주 급박하게 상황이 변했다.

병원 들어 간지 30분도 안되어 둘째가 세상에 나왔다. 나중에 의사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 봤다고 하며 태반이 거의 다 끊어진 상태였다고 말해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 둘은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정읍에서 식구 둘이 늘어 참 행복했다. 아침저녁으로 전북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아이들과 정읍천변을 거닐며 가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 이구나 하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읍에서 청년들과 달마다 10만씩 모아서 중국선교를 준비해서 중국을 다시 방문했다. 중국을 바쁘게 도망 나오고 탈북자 문제로 +목사님도 추방당한 상황이라 내 기록이 남아서 혹 입국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중국에 있을 때 탈북자들을 같이 도와주던 ++이 형제와 연락이 됐다. ++이가 여행사를 차려서 한국 선교사나 교회들을 상대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 여행사에서는 비행기 표만 끊고 돌아오는 배와 중국 상황은 ++ 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여행 경비가 반으로 줄어서 더 많은 청년들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가본 북경은 내가 생각한 것 외로 많이 변해 있었다. 우리가 있던 쌍펜푸는 거의 사라지고 고층 빌딩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라우뚱타샤 라는 30층 건물도 사라진 듯 했다. 청년들에게 한참 중국에 있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던 터라 청년들이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 이야기를 반만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로 중국에 같이 있던 조선족 친구들이 나오자 얼굴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중국에 도착하자 호텔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때 장쩌민이 묵었던 지역에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가 이득을 하나도 안보고 그냥 서비스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에게서 들은 또 하나의 소식을 추방당한 **님이 중국에 들어와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이었다.

    

위뀌이허를 다시 만나다.

    

다음날 만리장성을 가려고 아침을 먹고 호텔 로비에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중국인이 있었다. 위꾸이허 였다. 위꾸이허를 다시 만난 것이다. 13억 인구 중 한사람 그 호텔로비에서 위꾸이허를 보았다. 나는 청년들과 중국을 출발하기 전에 기도 제목으로 위꾸이허를 위해 같이 기도했다.

위꾸이허는 내가 중국을 급히 떠날 때 갑자기 헤어진 중국 청년이다. 위꾸이허를 만난 것은 인자누님과 경숙이 누님과 따통을 여행할 때였다. 따통의 운광석굴을 보러 갔다. 그날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진 추운 날이었다. 운광지역을 여행하고 따통으로 돌아왔는데 너물 일찍 돌아와 기차시간이 많이 남았다. 누님들이 추워해서 뜨거운 물을 얻으러 다녔는데 인심이 각박했다. 따통은 석탄이 많이 나는 지역인데 바람이 불면 석탄가루가 날려 검은 먼지가 일었다. 코를 풀면 검은 콧물이 나왔다. 그래서 생수가 귀했다. 그래서 인지 가는 곳마다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물이 있을만한 호텔로 찾아갔다. 호텔 로비에서 직원들은 호텔에 묵을 손님인지 알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호텔로비에 바가 있어서 그곳에서 착하게 보인 직원에게 물을 좀 얻을 수 있냐 하자 물 한 컵을 주었다. 추운 몸을 녹일만한 물이었다. 그런데 눈치가 빠른 이 청년이 혹시 물통 있으면 물통에 뜨거운 물을 채워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 청년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솔직하게 물을 얻으러 왔다고 말했다. 물을 채워준 청년은 혹시 일행이 있으면 바에서 조금 쉬어서 가도 된다고 했다. 자신이 지배인이고 지금은 손님도 없어서 괜찮다고 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누님들을 모시고 호텔 바에서 조금 쉬기로 했다.

그 청년은 우리가 북경에서 온 북경사람인줄 알았는지 북경의 소식을 물었다. 나는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 그 청년에게 나는 선교사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청년의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 믿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교회 다니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간암과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간질환으로 죽고 또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도 어렸을 때 간질환이 있어서 의사가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살던 마을에 홍콩선교사가 와서 안수해주어서 치유 받았다고 한다. 그때 자신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다고 하며 내가 가장 부럽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안수 받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근무 시간이라 안 되고 자신이 퇴근하면 우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퇴근 시간이 우리가 북경으로 갈 기차시간하고 겹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 정보도 없는 청년을 위해 신분이 노출된 상황에서 그곳에 오래 있는 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힘들겠다고 했는데 두 누님은 기다리고 그를 축복해 주고 가자고 하며 기차표를 연장해 버렸다.

    

별수 없이 그 청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 청년이 퇴근하고 우리는 호텔 뒷마당에서 그를 축복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주의 종이 될 길을 열어달라는 기도의 요청을 했다. 중국은 당시 남경 신학교를 가려면 고등학교 이상 나와야 남경 신학교를 갈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이 호텔에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일에 겨우 밥이나 먹고 산 정도였다. 그런데 너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호텔 사장이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게 해주어 젊은 친구가 지배인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청년 기도대로 그의 서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해 달라고 기도했다. 갑자기 그 청년이 통곡하며 함께 기도했다. 감사했다. 먼 곳에 와서 믿는 청년을 만나게 되고 그의 미래를 축복하는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 따통의 여행은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 청년은 우리를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고 돌아갔다.

    

북경으로 돌아와 며칠 후 선교사 회의에 나갔는데 어떤 목사님이 남부에 신학교를 세웠는데 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다. 소명은 있는데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목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 신학을 가르치고 외국의 신학교와 자매결연 하여 학위를 주겠다는 것이다. 학비는 무료고 생활비도 지원해 주는 조건을 이야기 하며 그런 학생들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갑자기 따통의 청년이 생각났다.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인자누님 기숙사에 연락을 했다. 누님은 바로 그 청년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며 마음에 있으면 북경으로 오라고 했다.  그 청년은 따통의 생활을 정리하려면 한 달정도 시간이 필요하다며 한 달 후 북경으로 오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며칠 후 인자 누님이 그 청년이 북경에 왔는데 어떻게 하냐고 연락이 왔다. 너무 일찍 북경으로 온 것이다.  당시 나는 탈북자들과 살고 있었는데 별수 없이  그 청년을 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올수 밖에 없었다.

    

위꾸이허와  그날을 회상하다

    

  정읍의 청년들과 중국을 찾은 다음날 아침에 잃어버렸던 친구 따통의 청년 위꾸이허를 그 호텔에서 본 것이다. 그 아이 첫마디가 "왜 나 버리고 갔냐"고 했다. 뒤통수를 치는 소리였다. 내가 "언제 너를 버렸냐"며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다"고 이야기 했다. 그 아이는 "아니라고 하며 내가 위꾸이허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듯 하여  그 아이에게 "저녁에 내방으로 오라"고 호실을 알려 주었다.

    

만리장성과 용경협을 둘러보고 저녁 늦게 들어와 보니 내방에 이미 위꾸이허가 있었다. 늦어 집에 간다고 하는 것을 그냥 내방에서 같이 자자고 해서 눌러 앉혔다. 청년들이 말로만 듣던 위꾸이허가 내 방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려와 밤늦게 까지 서로 이야기 하고 지냈다. 그날 잘 하지도 못하는 중국어 통역관이 되었다.

청년들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죽던 날 위꾸이허는 밖에 있었고 돌아가 보니 생활관은 피가 낭자해 있었고 탈북자들은 이미 다 피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꾸이허는 그 친구들이 탈북자들인 줄 몰랐다고 한다. 그 날도 내가 다시 돌아올 줄 알고 기다라고 있는데 갑자기 공안이 들이닥쳐 자기를 잡아가지고 가서 취조를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가 위꾸이허는 아무것도 모르고 북경에 온지 며칠되지도 않는다고 해서 풀려났고 갈 곳이 없어 중국에서 제일 큰 충원문 교회 목사님에게 찾아갔고 그 목사님이 좋게 보아서 교회에서 머물게 해주었단다. 나중에 자녀가 없는 목사님이 이 아이를 양아들로 삼고 검정고시를 보아 중국 인민대학 영어학부에 다니고 있고 호텔에는 한국에서 온 신학교수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가이들 하러 왔다가 나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해에 인민대학을 휴학하고 남경에 있는 남경신학에 들어가 졸업하면 미국에 유학 가서 나중에 중국교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나에게 이야기 했다. 잘 지낸다고 하니 너무 감사했다. 지금까지 빚진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젠 잊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 위쿠이허와 그날을 다시 회상했다. 위쿠이허가 탈북자들이 사는곳으로 들어온지 얼마후 나는 그때 사역을 넘기고 숙소를 기무사 대령 출신 집사님 집으로 잠시 옮겼다. 그런데 두주 후 선교사님들이 철수하거나 숨기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집사님에게서 들었다. 무슨 일 있는가 했는데 집사님은 내가 했던 탈북자 사역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들 잡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님 소식을 알아봐야 했다. **님은 이미 가족들과 북경에서 심양으로 옮겨 심양에서 서울로 들어가고 없었다. **도 사라지고 없었다. **도 연락이 안되었다. 모두 자취를 감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수 없었다.  탈북자 숙소가 있는 곳으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쌍첸푸 지역에 가자 경비가 삼엄했다. 탈북자 숙소가 있는 집은 중무장한 무장 경관이 보초를 서고 있고 앞에는 빨간 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경계선이 쳐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형제들은 조선족들은 다 어디가고 어떻게 된지 모를 일이었다. 

    

그 후 소식은 장신대 후배들이 +++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일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데려온 탈북자가 죽었다는 것이다. 성도라고 이름지어준 탈북자가 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둘이 다툼이 일어났는데 성도가 칼을 던졌고 그 칼이 명치에 맞아 쓰러지자 조선족  형제가 병원에 데려갔는데 병원에 데려가자마자 죽고 그 형제는 공안에 잡혀가서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탈북자들은 흩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죽은 탈북자에게는 나이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어떻게 됐냐고 하자 그 아이는 심양에 있는 선교사에게 보내지고 다른 탈북자들도 다른 선교사들에게 한명 두 명 흩어진 것 같다는 것이다. 들려오는 정보는 불확실 했고 상황을 매우 좋지 않았다.  상황을 정확히 알기위해서는 주일날 교회를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라우퉁타샤로 갔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일부러 시장을 거쳐 들어갔는데 시장 쪽에 경찰버스가 와 있었다. 무장경관들도 보였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로비를 지키는 경비가 눈을 깜빡였다.  원래 늘 웃고 내가 사탕을 주면 장난친 아이인데 그날 너무 긴장되어 있고 나더러 돌아가라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무슨 상황인지 알기위해 일부러 예배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에 들어가려고 호텔을 나와 시장을 서성이다 예배 시간이 넘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10층에서 예배드리는데 9층을 눌렀다. 9층에서 내리는데 호텔직원들이 다 긴장하고 10층 서빙 하는 애들도 9층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 아이가 올라가지 마라 하며 지금 짠쪼증 검사를 한다는 것이다. 탈북자들과 우리를 찾으러 교회까지 온 것이다. 위험했다. 그래서 직원들이 다니는 계단으로 내려와 호텔을 빠져 나왔다.

    

나중에 유학생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날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신분증 검사를 했는데 홍부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조선족 형제가 이야기를 다 한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형제는 내 본명이 홍부장인줄 안다. 여권을 늘 입고 다니는 두꺼운 옷 안쪽을 따서 넣고 꿰매어 버렸기 때문에 내 여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내가 홍부장이라고 하니 홍부장인줄 알고 나를 찾았을 것이다. **님은 도망가고 **은 잠수타 버렸으니 자신이 살기위해 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날 교회를 덮쳐 아무 소용이 없자 탈북자 찾는다고 알리좡 아파트를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한다.  소문은 무성했고 한국인들은 무슨일이 일어난줄 잘 모른듯 했다. 다행히 나는 경찰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중국 장성들이 사는 아파트에 머물고 있어 안전했다.

    

문제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다들 문제없으니 그냥 중국에 있어도 된다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그렇다면 왜 다들 한국으로 들어가 버렸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소한 나에게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탈북자 맡겨 놓고는 나 몰라라 하더니 이제는 문제가 생기니까 자기들만 도망가 버린 것이다.  최 집사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답했는지 그날 최집사님은 만취해서 돌아와 나에게 술주정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집사님이 그때 나를 보호해 주어서 오늘 이렇게 무사한 것이다. 그때 잡혔으면 그 때 법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빠졌던지 오랫동안 중국 교도소에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답이 없는 것을 알고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여행사를 갔는데 다음날 비행기 표가 하나 있었다. 돈을 달라면  얼마라도 주고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정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다. 먼저 교회 회계집사님에게 귀국한다고 알렸다. 당신 회계 집사님은 통일부에서 언어연수 나온 분이셨다. 지금도 고위직에 있어 실명을 거론할 수 없지만 그때 집사님이 내가 헌금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계산해서 다시 돌려주셨다.  그렇게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당장 돈이 필요한데 그것이라도 해 주어야 한다며 주시고 가셨다. 고마웠다. 당장 돈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또 다른 도우심 이었다. 출발하는 아침 최집사님은 공항까지 가지 못한다고 해서 혼자 가려고 하는데 회계집사님이 아파트에 나타나셨다.

    

공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상황에서 정부 관료가 따라가 준다고 하니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집사님이 주의를 주었다. 누가 접근하면 말도 하지 말고 멀리하라는 것이다.  감사하다 인사하고 공항 수속을 마쳤다. 이제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는데 불안하게도 비행기 시간이 뒤로 미쳐졌다.  기도가 간절하게 나왔다.

회계집사님 말대로 누가 접근해서 자꾸 말을 시켰다. 그냥 중국어로 모른다고 하며 회피했다.  비행기가 뜬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공항버스 타고 비행기까지 가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런데 또 비행기가 뜨지 않고 여권 검사를 다시 했다. 땀이 비 오듯 나왔다. 나를 찾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비행기가 떴다. 감사했다.  비행기에서 한국 영토에 들어왔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늘 대한항공이 비싸다고 욕만 하고 다녔는데 그날 대한항공이라는 우리나라 항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겼다.

    

한국에 들어와 처음 한 일은 최집사님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 런민삐 유조 지폐가 있었는데 그것을 ++집사님이  모아서 한국으로 보낸 일을 하고 있었다. 기무사를 제대했다고 했는데 북한 관련일 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자세한 것을 물으면 질문을 회피하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당시 한국과 수교가 된지 얼마 안 돼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최집사님이 보내주라고 한 주소를 적어 전에 중국에서 보았던 황부장에게 보냈다. 두 번째는 제자교회에 *** 선교사가 보낸 선교 편지를  그 교회 담임목사님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내말도 쓰여 있는지 그 목사님은 사역지가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교회에서 북한 탈북자 선교사 지원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결과를 보고 그 말은 립 서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선교사는 탈북자들에게 일대일 제자 사역을 감당한 선교사이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명을 쓰지 않고 예명만 썼다. 대부분 선교사 본명을 아는 경우는 친한 사이 아니면 다 예명을 썼다. 보안상 그렇기도 하지만 서로 믿을 수 없는 것이 진짜 이유일 것이다.  평상시에는 중국 학생들에게 중국어로 일대일 제자양육을 하는 평신도 선교사이다.  중국에서는 ***이라는 가명을 썼다. 지금은 추방당해 미국에 있다고 들었다. 한참 한국 경제 상황이 안 좋아 선교사들이 철수할 때 그 분도 철수하려고 했는데  중국인 제자들이 돈을 모아 그분 자녀들 학비와 생활비를 대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국에서 외국 선교사들은 돈이나 가져다주는 봉인데 중국인들이 헌금을 모아서 선교사 생활비를 대는 것은 한국 선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한국에 들어와서 꼭 해야 할 일이 ***님을 만나는 일이었다. ***님은 나의선교의 꿈을 깨버리게 한 분이시기도 하다.

    

  ***님은 처음부터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분과의 만남중 정말 아쉬운 것이 있다면 우리를 그냥 버릴 수 있는 소모품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큰 일이 일어났는데 나에게는 알려주지도 않고 자기들만 피해 버린것일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내가 이 사람들에게 보잘것없는 소모품 정도라는 것을 느낀 것은 가정교회에 성경을 전달해준 사역을 하면서이다. 이 성경들은 정확히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일부에 성경공장에서 찍은 성경을 북경으로 운반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누가 해준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북경 역에 가서 받아가지고 북경 역에서 여행사까지 가져오는 일을 +++들이 하고 있었다. 그것이 위험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면, 그것을 어린 청년 사역자들에게 맡긴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날도 북경 역에서 쪽지를 받고 **부장하고 성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성경을 받는데 짐이 너무 많았다. 내 허리까지 차는 큰 가방이 10개 정도 되었다. 누가 봐도 주목할 만한 것인데 그중 가방이 하나 터져 있었다. 물건을 실으려다 찢어진 것이다. 내리다 성경이 떨어졌다. 다시 주어담고 실을 사서 꿰맸다. 혹 경찰이 볼까봐 땀을 비질 비질 흐렸다. 다행히 지나가던 공안이 뭐냐고 물어 그냥 아이들 줄 책이라고 얼버무려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책을 주어담고 그리고 가방을 꿰맬 때 기둥 뒤에서 유심히 보고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었다. 이 사역의 책임자이다.  처음에는 와서 도와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꼼짝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다행히 짐을 가지고 무사히 역내를 빠져 나왔다. 이제 **이 차를 빌려오면 실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 한 시간이 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손에 땀이 나는 느낌이다.

    

한국에 들어와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나만 나두고 먼저 들어오신 분을 만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본 그분은 초라해 보였다. 나에게 묻는 첫 마디가 왜 들어왔냐고 물으셨다.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허허허 웃으셨다. 인사 드려야 할 것 같아 인사드리러 왔다고 하고 자리를 떴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위꾸허를 다시 만날날을 기약하며

    

몇 년 만에 만난 위뀌이허는 내가 22살 때 만난 청년이 아닌 중국 미래의 지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위꾸이허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자 자신이 오해했다며 그동안의 오해를 풀었다. 다음날 청두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청두까지 따라오겠다는 것이다. 나는 위꾸이허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 반지 한국에 들어와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모두 주고 왔다.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에게 나중에 중국지도가가 되면 갚으라고 하자 받아주었다.

    

인천 가는 배안에서 청년들은 중국에서 가장 은혜 받은 것이 위꾸이허를 만난 것이라는 간증을 들었다. 나도 13억 인구 중에 그 아이를 거기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기도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한 사건이다. 내가 작년에 우리 섬김과 나눔의 교회에 인자누님과 경숙이 누님이 와서 따통에서 우리가 만난  위꾸이허를 중국 여행 중 만났다고 하니까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많은 것을 옆에서 보고 지켜본 사람들도 말이다.

    

제주도를 일주하다

    

정읍영락교회 청년들과 그 다음해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갔다.  인정은 은정이 쌍둥이 형제 영우 그리고 이름을 잃어 버린 친구들 그렇게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 힘들 기도 했지만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여행밖에 없는 것 같다. 포도원에서도 한해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청년들과 같다. 그런데 제주도 가는 배에서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청년들의 꾐에 넘어가 자전거 대신 봉고를 렌트해서 제주도 일주를 했다. 아주 재미있었던 느낌은 있는데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실패한 여행이었음이 분명하다. 섬김과 나눔의 교회에 와서도 청년들을 데리고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갔는데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런지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젊은 애들에게 약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고 죽도록 달렸다.

    

정읍 영락교회에서 어느덧 목사님이 은퇴할 시점이 오자 장로님들과 목사님 갈등이 시작됐다. 일부 장로님들은 나에게 목사님일은 개입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목회자라는 인생의 비참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젊은 날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분이 개척하라는 은혜를 입고 그 교회를 개척해서 자기가 지금까지 모아놓은 모든 재산을 교회에 바쳤다. 그리고 또 건축하면서 헌금하기 위해 빛을 내서 드렸다. 이제 교회가 빚도 갚고 어느덧 안정되니 은퇴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교회에 30년 계셨는데 변변한 집하나 장만하시지 못했다. 그런데 교회는 그동안 모아온 돈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본인이 세례주고 중매 서서 결혼시킨 사람들이 장로가 되었는데 이제 그냥 교회를 떠나가라 하는 분위기였다. 교회가 은퇴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는데 한 번도 모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힘든 일들이 자꾸 터지자 장로님들 생각이 바뀌었다. 교회가 나누어질 수 있다는 생각들을 하신 것 같다. 그래서 모여 목사님 돌아가실 때까지 월 100만원씩 사례비를 드리고 원로 목사예우를 하며 사택을 따로 구입해서 이사 가시도록 한다고 당회서 결의하고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거쳤다. 그날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했다. 목사님은 고맙다 하시며 자신이 은퇴 할 때까지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목사님일이 해결되자 교회에서 나는 왕따였다. 목사님 은퇴 시기가 반년 남은 동안 나는 교회를 찾아보아야 했다. 교회를 옮겨야 하는 사정을 어려움이 있으면 상담해 주시던 순천 상사교회 김성한 목사님께 말씀 드렸더니 포도원교회가 어려운데 부목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야기 해놓았으니 이력서 가지고 찾아가보라 하셨다. 그래서 포도원 백주석 목사님을 뵙고 포도원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조용섭 목사님은 은퇴후 또 개척하셨다고 한다. 참 열정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영락교회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교회 교인을 절대 받아주시지 않고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만들어 가는 교회라고 주변 목회자가 말해주어 안심이 되었다.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포도원교회에서 사역하다

    

광주포도원교회로 부임할 때 포도원교회는 침체를 회복하기 위해 발 부등 치고 있는 교회였다. 담임목사님은 많이 지쳐 있었고 모든 부목사님들이 함께 사임한지 반년동안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한 상태로 사역적인 공백이 커 처음 부임하였을 때는 무척 부담이 가는 교회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부임할 때 주일출석이 450여명이었던 교회가 그 다음해에 1200명 정도 될 정도로 부흥하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처음 교회를 부임했을 때는 주변에서 듣는 소리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첫 예배는 청년부 요청으로 이사하자마자 그날 청년부에 가서 설교를 했다. 청년 12명이 참석했다. 청년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장로님께서 기다리시다가 청년부는 어려우니 맞지 말라고 조언해 주셨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교역자 무덤이라고 하시며 생각고 이야기 해주셨다. 모든 교역자들이 청년부를 맡아서 실패했고 담임목사님도 하다 실패했다고 혹 누가 청년부를 맞아달라면 거절하라고 귀띔해 주셨다.

    

주일날 인사하고 그 다음날 고등부 수련회 강사로 불려갔다. 수련회 준비로 고등부 교사들끼리 다투었는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일부러 가장 후지꾸리한 옷을 입고 갔다. 분위기는 내 예상과 같았다. 다들 무시하고 괄시하는 분위기 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승우라는 청년이 물어왔다. 수련회 프로그램을 묻는 듯 했다. 계획한 대로 모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저녁 시간만 나에게 주라고 했다. 그때 수련회 장소가 백일도 였던것 같다. 지금 사역하는 노회 안에 있는 교회인데 바다가 아주 아름다웠다. 숙소는 해변에서 큰 텐트를 치고 집회는 20분 거리의 예배당에 가서 했다.  저녁 집회시간에 아이들 찬양단이 1시간을 찬양하였다. 내 설교 시간은 20분 정도 준것이다.  교사들을 거의 참석하지 않고 구남해 집사 가족만 참석했다.  그날 저녁 말씀을 듣던 아이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의 변화가 포도원 사역의 시작이었다.  그날 설교는 다니엘 설교를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은 그날 아빠 따라온 아이가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구남해 집사 아들이 집회가 끝나고 가슴이 터져버릴것 같다고 하며 내게 안수해 달라고 다가왔다. 캠프파이어를 하려고 불을 거의 소등한 상황에 갑자기 아이가 나타나자 매우 놀랐다.  어디가 아픈 것인가 하며 다시 물었다. 아이는 말씀을 듣고 자신도 다니엘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며 말씀의 감격에 가슴이 터져 버리고 숨도 쉬기가 힘들다고 했다. 걱정이 되어 안수해 주었다. 수련회에 돌아와 구남해 집사는 자신의 아이가 변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성경책을 가지고 예배드리자고 한다는 것이다.

    

수련회에 돌아와 변화된 것은 고등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새벽에 설교하려고 단에 오르는데 고등부 아이들이 새벽예배를 나온 것이다. 그리고 1년간 이 아이들이 새벽예배에 나왔다. 고등부 아이들의 변화는 당시 청년들에게 충격을 준듯하다. 그때 만난 고등부 아이들이 나중에 청년부에 올라와서 내 수족들이 되어주었다.

    

  포도원 처음 사역은 정신이 없었다. 모든 교역자들이 사임한 상황이라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고 하는 상황이 안되었다. 고등부도 맡고 청년부도 맡고 행정목사에 교구 총괄에 수석 부목사 일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화요 중보기도에 목사님이 몸이 좋지 않아 새벽기도와 금요철야를 전담하듯 해야 했다.

    

포도원의 사역을 가장 많이 도와주신 분들은 천배식 장로님 김권술 장로님이셨다. 나와 천장로님과 사이는 공식적으로는 좋지 않는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늘 회의 시간에 옥신각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회하기 전에 천장로님과 나는 교회 일을 거의 토론을 거치고 할 때가 많았다. 합의가 될 때도 있었고 합의가 안 되는 일들은 당회에서도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당회원들의 판단에 맡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위태하게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둘은 매우 가까운 동역자였다. 늘 천장로님은 홍목사님 없었으면 지금 포도원은 더 큰 위기가 있었을 것 이라고 하고 나는 천장로님이 포도원 교회의 수석 장로로 있는 것이 포도원의 축복이라고 말하며 서로 위로하며 살았다. 포도원에서 내가 만난 축복의 통로는 천장로님 일 것이다.

    

늘 힘든 일은 천장로님이 욕을 먹으면서 해결해 갔다. 부 교역자들 일이든 교회 건축일이든 누군가 총대를 매야 하는 일에 수석장로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섬김과 나눔의 교회로 사역지를 옮긴 것이 결정된 것을 가장 먼저 아신 분이 장로님이셨다. 어디서 들었는지 전화로 축하하신다 하시면서 자신도 포도원을 떠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인지 우연인지 몰라도 우리는 똑같은 주에 포도원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내가 포도원 사람 중 늘 기도를 잊지 않고 기도하는 분이 김권술 장로님이시다. 늘 내게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려고 애쓰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연락도 잘 드리지 못하지만 새벽에 생각날 때 마다 건강을 회복 시켜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말씀을 전할 때면 늘 기둥 옆에서 눈물을 훔치시며 아멘 하시던 장로님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청년사역을 시작하다

    

포도원 사역 중 가장 행복한 사역은 청년 사역이었다. 교회 안에 청년부를 포기하고 청년부를 나오지 않는 깨어있는 청년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불러 모아 청년부를 다시 재건했다. 그해 여름 수련회에 청년들이 다수가 참여했고 청년들을 물을 만난 고기처럼 성장하기 시작했다. 나의 포도원의 사역의 꽃은 청년 사역이었다.

    

여름수련회를 화순 수양림에서 했다.  처음에는12명 신청을 했는데 회장에게 더 많이 갈 것이라 했다. 저녁 설교 때 청년부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청년부 수련회에 청년들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청년들이 오십 명이상 등록을 했다. 문제는 숙소였다. 아이들을 소수의 인원에 맞추어 수련회를 준비했는데 잠잘 곳도 집회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로 교회 대형텐트 3개를 하나로 이어 집회 장소를 만들라고 했다. 이 첫 번째 청년부 수련회에 포도원 사역의 모든 것을 걸었다. 죽을힘을 다해 기도하고 죽을힘을 다해 설교했다. 청년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도우셨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어린이집 교사가 방언을 받았고 많은 아이들이 회심을 했다. 용현이란 아이는 술을 끊겠다고 약속을 했다. 가장 큰 소득은 청년 사역 동역자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 집회를 통해 광남이 세경이 정현이 다행이 승우를 얻었다. 광남이와 세경이는 교회를 옮길 계획을 하고 벧엘교회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들은 대학에서 선교 훈련을 받아 선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아이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청년부를 진 체제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청년 새벽 큐티를 시작했다. 청년부 사무실과 청년부 전용 봉고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청년들의 기도는 그 다음 주에 바로 응답되었다. 교회  주차장 모퉁이에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이 나와 당회에서 구입하자는 안건을 장로님들이 하였고 바로 매입하였다. 문제는 그 건물의 사용처였다. 그래서 한 칸을 청년부에게 달라고 하여 청년부 사무실로 쓰기로 하였다. 그 후 교회에서 봉고를 하나 더 사서 청년부 전용은 아니지만 청년들이 움직이는데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갖자고 건의해서 한 달에 한번 올 철야를 하기로 했다. 이름은 진다지기로 하기로 하고  고등부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참 기도하고  쉬는 시간이 되었는데 우리가 모른 청년이 우리 안에 있었다. 다들 새로 나온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지나가다가 기도소리가 나서 들어왔단다. 교회 문을 거의 다 잠그고 우리만 아는 쪽문을 열어 놓았는데 어떻게 들어왔냐고 하자 교회 들어 올려고 모든 문을 열어 보았는데 그 문이 열려 들어왔고 기도 소리가 맨 꼭대기 층에서 들려 꼭대기 층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그날 이 아이는 처음으로 교회 왔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갑자기 급사하고 마음이 힘들어 술이나 한잔 하자 하고 집에서 나왔는데 교회 지나가다 기도소리에 잡힌 것이다. 나중에 이 청년은 아버지도 전도하고 세례 받고 서울로 이사를 갈 때까지 열심히 교회에 나왔다.

    

그해 말 청년들이 백명까지 모이기도 했다. 포도원의 부흥의 동력을 얻은 것이다. 이 아이들이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사로 다음해에 들어가 모든 부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모든 예배에 동력이 되어주었다. 저녁예배는 어른들만 드리던 교회가 청년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찬양이 달라지고 기도소리가 달라졌다. 나중에는 청년들 자리를 중고등부 아이들이 차지해 버릴 정도로 저녁예배가 부흥을 했다.

    

미자립교회 성경학교를 시작하며

    

다음 해 청년부 수련회를 새로 계획하고 부안에 있는 미자립 교회 아이들을 위한 성경학교를 시작했다. 장소는 흥덕제일교회를 빌렸고 교회는 전서노회에 소속한 교회로 한정했다. 교회 모집은 부안 영전교회 김영길 목사님이 맡아주었다. 내게는 성서신학원에서 만난 형님이시다. 아이들이 150명 정도 신청을 했다. 우리 청년들까지 하면 200명이 넘었다. 당시로서는 아주 벅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 일로 청년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몇 주 전부터 율동과 성경공부를 준비했다. 프로그램은 단순하게 기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복음제시와 기도하는 방법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공과로 만들어 먼저 청년들에게 가르치고 청년들을 성경학교 교사로 만들었다. 

    

주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선발대를 데리고 흥덕 제일교회로 갔다. 선발대가 도착하여 그날 모든 수련회 준비를 완료했다. 다음날 후발대 청년들이 들어오고 아이들 맞을 준비를 했다. 긴장되었다. 성경학교는 대 성공이었다. 가장 큰 성공은 대학교 1학년 아이들이 변화한 것이다. 자신들이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공과를 외워야 했고 기도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했고  아이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애타는 심정으로 바라보며 목사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기도시키기 위해 울고 또 우는 청년들을 보며 감사하고 감사했다. 먼저 청년들이 변하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둘째 날부터 변화기 시작했다.

    

찬양은 소연숙 전도사가 맡아 주었다. 소전도사는 이날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보았다고 했다. 성경학교 집회는 포도원에서도 보지 못한 부흥이 일어났다.  지금 소전도사님은 우리 총회 율동강사다. 우리 집사람 친구인데 포도원에서는 그래서 낙하산이 다는 소문이 들렸다고 한다. 그 소리에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소전도사를 데리고 온 것은 그 나이에 그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일은 모를 일이다.  내 밑에 있었던 소전도사가 총회 율동 스타 강사라니 말이다.

    

그날 소전도사님이 찬양을 하는데 아이들이 의자 위에 올라가 뛰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 성경책을 올려놓은 부분까지 올라가 뛰는 것을 보고 나도 놀랬다. 소전도사님도 놀란 눈치였다. 많은 주일학교 집회를 했지만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무슨 신들린 아이들처럼 바뀌었다. 기도 시간에 아이들 기도가 터지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포도원에서도 힘든 일이 주일학교가 없는 메마른 아이들 심령에서 샘이 터진 것이다. 매 주일 예배 방해된다고 예배당 밖에서 놀던 아이들이다. 그러면서 교회 다닌다고 소외당한 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성령 받고 방언 받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기도문을 연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그날 밤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우는 아이가 있었다. 목을 누군가 잡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주여 해보라고 하자 붕어처럼 입만 벙긋했다. 게임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가장 활발한 아이가 기도시간이 되자 풀이 죽고 자기 마음대로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사단의 역사였다. 이 아이에게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영접시켰다. 그리고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해  그 교회 6학년 아이는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돌아왔고 이 아이는 가장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난에게 한 첫 마디를 잊지 못한다. 갑자기 나를 보더니 기뻐하며 목사님 오늘을 우는것 안 해요 하는 것이다. 우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이 아이가 통성기도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일 년전 기도회가 이 아이에게는 잊지 못할 영적체험의 기회가 된 것이다. 이 아이를 변화시킨 하나님께 감사했다.

    

첫 성경학교 저녁 집회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이 부흥은 물질적인 부족한 면도 채워주시기 시작했다. 직장 다니는 청년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고 하면서 청년들은 사흘 만에 어른들이 되어있었다. 늘 나에게 꾸중을 듣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랑스러운 내 제자들이 되어갔다.

    

성경학교를 마치고 사흘을 영전교회로 옮겨 청년부 수련회를 했다. 청년들은 자기 안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는지 그곳에서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체력을 따라잡지 못한 나는 샤워하고 일찍 잤다. 2시경 본당에 들어갔는데 모두들 아직 기도하고 있었다. 감동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의 저항처럼 보였다.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들은 자기 안에 일어난 이 기적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청년은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향한 몸부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약속한 해수욕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아침부터 장대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비가 많이 오던지 곧곧에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움직이지 못하자 교회에서 준비 안 된 느헤미야 강해를 시작했다. 반응은 다시 불에 기름을 붓는 분위기로 변했다.

    

11시 30분에 끝내고 통성기도 시키고 내려왔는데 점심이 다 되도록 아무도 내려오지 않고 본당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배고파서 라면이라도 끓여먹을까 하다 더 기다리자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내려오지 않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별수 없이 내가 점심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성경 학교 때 떡집에서 밥을 쪄서 배달을 했는데 남은 밥이 박스에 담겨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이 수련회때 먹으려고 가지고 온 것 같아 열어보니 한 끼 충분히 먹을 양은 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냐 하다 교회에서 가장 큰 다라를 가져다가 거기에 밥을 다 넣고 성경학교 때 먹고 남은 반찬 중 비빔밥을 할 수 있는 반찬을 모두 넣었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끼고 일회용 비닐장갑을 한번 떠 끼고 손으로 비벼 비빔밥을 만들었다. 다 만들어 가는데  시간이 지나고  배고팠는지 아이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아이들은 내가 만들어준 비빔밥을 행복하게  먹어주었다. 맛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내가 먹어보아도 맛있었다.

    

잊지못할 영적제자들

    

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청년은 정현이와 광수이다. 광수는 지병이 있어서 군대를 가지 않았고 아버지를 일찍 잃고 좌절하며 호남대를 오래 다녀 몇 년 만에 졸업을 했다. 집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 애가 어느 날 설교를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그때부터 다른 것은 안 해도 예배는 빠지지 않고 나왔다. 어느 날 광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찾아와서 어떻게 살면 되겠냐고 물었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 업체에 넣어줄 생각으로 자격증이 있냐? 잘하는 것이 있냐? 물었더니 고작 대학 자격증하나 있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새벽예배 나와 기도하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댈 것은 하나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한 것이다. 운전면허가 없다고 해서 운전면허를 따오라고 했는데 학원등록을 안 해 혼내 놓았더니 어머니 권사님께 일러서 어머니가 전화하기에 이 아이 사람 만들고 싶으면 제가 하자는 대로 하라고 했다. 그 다음날 운전면허등록하고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금호고속에 입사시험을 보았다. 첫 번째 면접볼 때 운전면허 있냐고 묻더란다. 그리고 주일날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자 하고 해서 자신감도 없고 해서 합격을 포기하고 나왔는데 회사에서 왜 출근안하냐고 연락이온이다. 합격 통지를 해야 하는데 비서실에서 연락을 안 한 것이다. 부랴부랴 출근하고 그날 저녁에 집에 찾아와서 울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 주절주절 이야기 했다.

    

상무가  전에 교회 다니다 회사 다니며 교회 다니지 못한 사람이라 눈여겨 본것 같다. 처음에는 부서에서는 낙하산이라고 하고 의자하나만 주며 괄시한 듯하다.  일요일 날 상무가 지나가다 그렇게 의자 하나에 앉아있는 이 아이가 불쌍했던지 화를 내면 다음부터 일요일 날 이 아이 교회가야 하니깐 일요일 날 쉬게 해 주라 했다고 한다. 이 청년이 제 성경공부는 1시간도 안 빠지고 했는데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니깐 성경공부는 잘한다고 하니 상무가 자기에게 성경공부 가르쳐 달라고 해서 30분간 상무를 성경공부 시켰다고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이 아이에게 타나난 것이다.  그 후 이 아이는 여자 청년들에게 관심 1호가 되었다. 지금은 좋은 처녀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이 청년의 삶의 축복은 다른 청년들에게 도미노현상이 일어났다.  다른 청년들에게도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세관 이는 누나 세경이가 시험보기 전날 한번 읽어보라던 영어독해 문제가 나와 대우건설에 취직되었다고 나에게 간증했다. 다행 이는 새벽기도에 나와 기도한지 얼마 안 되어 국민은행에 들어갔다. 조선대 나온 아이가 국민은행에 들어간 것은 기적이라고 연합뉴스와 조선일보 인터넷 뉴스에 톱기사로 뜨는 것을 보았다. 용현 이는 외국계 자격증을 얻어 동기들 누구보다도 먼저 취직을 했다.

    

정현 이는 늘 내 옆에 있던 제자이다. 지금도 몸은 멀리 있지만 늘 스승으로 알고 찾아오고 무엇이든 시키면 죽는 시늉도 하는 아이이다. 힘들 때도 기쁠 때도 늘 내 옆에 정현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늘 안타까웠던 것은 직장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가장 내 옆에 있었던 제자였는지도 모른다.

포도원을 떠날 때도 가장 마음에 아픈 것은 이 아이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 녹십자에 취직하게 되고 장인 되실 분 소원대로 취직하여 은진 이와 결혼한 것이다. 그 후로  이 아이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옆에서 자신을 위해 주님을 위해 청년부를 위해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아이가 정현일 것이다. 나는 이 청년의 앞길에 하나님이 그 기도의 열심을 아시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를  소원한다. 벌써 이 아이들이 30대 후반이 되고 40대 초반이 되어 같이 늙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 나는 대로 아직 기억이 초롱초롱할 때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 놓으려고 한다.  포도원 사역이야기는 할 말이 너무 많이 있지만 조금씩 기록해 나갈 것이다.  민감한 이야기들은  더 나이가 들면 그때 덧붙여 쓰려고 한다.

    

갈등 속에 영적부흥이 일어나다

    

포도원에서 4년째 던 해에 부교역자들과 담임목사님 사이의 갈등이 일어났다. 그 관계로 교회를 옮기려고 했으나 쉽게 옮겨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몇몇 권사님들이 눈치를 채고 금식기도를 하셨다고 하셨다. 미안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금식기도 까지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고 마음이 답답한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서 사역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역들을 나누어 다른 부교역자들에게 이관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축복하셨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말씀의 깊이를 나에게 주신 것이다. 말씀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깨닫는 수준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교역자가 기획한 40일 철야를 억지로 맡아 인도하면서 더 깊은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밤 11시에 나가 찬양준비하고 12시 부터 4시까지 찬양인도하고 말씀전하고 기도인도하면서 강단에서 5시간 집회를 매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은혜 주신대로 하다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되지 하고 시작한 일이 나에게는 갑절의 영적 능력을 얻는 시간이 되었다. 지나간 시간이라 은혜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날그날 목숨을 걸었다. 새벽기도 끝나고 집에 돌아가 잠시 잠을 자고 다시 9시에 출근하고  업체 개업예배 장례예배 등 수석부목사가 가야 할 예배를 인도하고 심방하고 교회 돌아와서는 교회 행정을 돌보고 저녁에 퇴근해 3시간 자고 다시 저녁 10시에 교회 나와 철야를 준비하고 철야인도하고 하는 40일의 시간을 다시 하라면 정말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년 1회씩 40일 철야를 했다. 나는 목사이니까 한다고 하지만 따라준 교인들이 참 대단했다는 생각을 한다.

    

40일 철야를 하고  그 다음해 부흥회를 준비를 위한 5일 철야를 인도하며 나는 또 다른 영적 세계를 체험했다. 그 느낌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5일 철야를 통해 그 다음해 또 40일 철야를  교인들의 요청에 의해 해야 만했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한번은 은혜로 했어도 두 번째는 하다가 죽을 것 같았다. 교인들이 하자고 하는데 하다가 죽으면 죽자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두 번째 철야를 할 때 포도원을 아주 힘든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철야의 은혜가 위기를 거뜬히 넘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다. 마지막 3일은 담임목사님께 맡겨 교회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다음해에 담임목사님이 사석에서 40일 철야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못하겠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솔직히 또 할 자신도 없었고 부교역자가 3년 연속 40일 철야를 인도한다는 것이 부담되기도 했고 눈치도 보였다. 몇 번 이야기 하셔도 반응이 없자 새벽기도 시간에 40일 철야를 하시겠다고 강단에서 말씀해 버리셨다.  별수 없이 40일 철야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교제로 다시 만들어 교인들에게 배부하고 담임목사님이 설교만 하고 찬양인도와 기도는 내가 감당하기로 했다. 3년간의 40일 철야는 내가 포도원에 더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훈련시키시는 기간이 되었다.

    

40일 철야를 하면서 또 한 가지 느끼고 경험한 것은 바뀌지 않은 성품과 인격이었다. 교인들이나 나나 영적으로는 충만해진 것 같았지만 과거의 구습을 쉽게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 눈에 보였다. 모든 교회가 영적 영적 하면서 외치면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충만한 영적 경험 속에서도 변화지 않은 내적인 모습들이 성도들과 내 자신을 더 공허하게 만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년간의 40일 철야를 통해 나는 내 신앙의 영적 성숙의 초점을 어디에다 맞추고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삶은 어는 한순간의 뜨거 움으로 변하지 않으므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순전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함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연단의 과정을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으며 내 생애 다시 감당하라고 하면 감당할 힘이 없는 시기를 은혜의 시기로 보내고 감사의 시기로 보내고 기도의 시간으로 보낸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담임이 되어 섬김과 나눔을 섬기다

    

사람은 늘 떠날 때를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포도원교회로 부임한 후 정신없이 사역하다보니 벌써 부교역자로선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새벽에 "하나님 나도 이제 담임을 하던지 개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새로운 사역지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이 오늘 사역하고 있는 섬김과 나눔의 교회다. 이곳에 와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느낀다. 오늘도 은혜로 산다. 한 일도 없는데 두 배의 부흥을 주시고 두 배의 말씀의 깊이를 주신 것 같다. 감사하다.

    

섬김과 나눔의 교회 와서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터어키와 그리스를 다녀왔다. 터어키에서는 갑바도기아와 소아시아 일곱교회 밧모섬을 들렸고, 그리스에서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테네를 들려서 왔다. 내 평생의 꿈인 아테네를 다녀온것은 평생 잊지못할 감동이다. 혼자서 꼭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도 아테네이다. 초대교회 성지를 보면서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먼 역사가 흐를때 한국교회도 이와 같이 다 무너지고 결국 건물만 남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바도기아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편한 목회를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물들지 않을 려고 노력한 선진들의 흔적은 세속을 배워 교회를 치장하고 세상의 철학을 성경화 시키고 철학자들의 사상 속에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는 그리스의 정교회와 아주 비교가 되었다. 서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산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이 추구한 세상은 아주 달랐다.  한쪽은 박해를 피해 더 순수함를 지키었고 한쪽은 신앙의 깊이를 위해 스스로 산으로 들어갔지만 물든 세속을 옷을 벗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교회는 갑바도기아의 교회라기 보다는  세속의 옷을 입은 그리스 정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지를 다니며 찍은 동영상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일곱교회를 오후 예배때 설교했다. 요즘 신천지 문제로 한국교회가 시끄러운데 강진에 신천지가 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해 둘겸 요한계시록을 동영상을 만들어 설교하고 있다.

    

나는 "성령보다, 말씀보다, 기도보다 그 무엇도 앞서서는 안 된다"라는 목회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더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고, 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더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섬김과 나눔의 교회 담임목사 홍정모

    

연락처

홍목사

https://web.godpia.com/gangjinsumna/ 섬김과 나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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